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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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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실 밖,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울타리 덕분에 정원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열쇠를 꼭 쥔 채 서 있었다.
노인의 뒤로 굉장히 견고해 보이는 사원이 보였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원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다고 한다. 두텁고 차가운 철문, 그 반대편에서 아이하라 마이가 "쾅쾅" 하며 문을 계속 두들기고 있었다.
"열어 주세요…… 열어 주세요, 할아버지! 마이를 내보내 주세요. 바래다주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말했지 않느냐, 오늘은 수행하는 날이라고……" 노인은 손녀의 학교 친구가 오늘 이사를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어른이 아이들의 약속을 이렇게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하라 가문은 여느 가정과는 달리,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천월 신사의 사명이 있었고, 노인이 보기에 천월 신사의 사명은 후계자인 외손녀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단 하루도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마이는 수행에 빠질 생각은 없어요! 그냥 친구랑 한마디,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할아버지! 마이는…… 마이는 이제 그 아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말이에요!"
"안 된다." 노인이 손녀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로 손녀에게 나쁜 습관이 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이 있으면 다음도 있을 테지…… 앞으로도 수많은 인연의 만남과 이별이 있을 터인데,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네 사명을 소
홀히 할 셈이냐?"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 문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도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가 건넨 야속한 진단서는 노인을 어쩌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노인은 정원의 금목서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딸과 함께 심었던 기념수였다.
'네가 아직 곁에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노인은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져 우스워 보였다.
한때 노인을 따라 사명을 계승하여 수행하던 딸도, 말 잘 듣던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결국 그 '착함'은 노인의 일방적인 바람이 깃든,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딸은 보자기에 싸인 마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이 기억하는 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사명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제게는 제 삶이 있습니다, 아버지."
사명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군. 아이하라 가문은 대대로 사명을 지키는 걸 영광으로 삼아 왔다. 그것이 아이하라 가문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다.
"흑흑…… 마이는 언제나 열심히 수행을 해 왔어요. 하지만…… 무녀가 되기 위해서라면, 정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건가요?"
외손녀의 흐느낌에, 노인은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분노와 실망, 그리고 억눌려 있던 또 하나의 감정…… 바로 후회였다.
"마이는…… 이제 사명이 싫어요, 흑흑…… 마이는 이제 수행 안 할래요! 마이에게는 마이의 삶이 있어요! 할아버지!"
노인은 그 감정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아이하라 가문의 존재 의미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하, 할아버지?! 마이…… 이제 나가도 되는 건가요?"
정신을 차려 보니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손녀를 떠나보내고, 금목서 밑에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주황빛 꽃술이 머리 위로 흩날리며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지금은 금목서가 피는 계절이 아니다. 노인은 눈앞의 풍경이 그저 스스로의 덧없는 희망이자 그리움이 투영한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딸은 더 이상 아내가 생전 즐겨 입던 무녀복을 입고 자신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해 딸이 성인식에서 보였던 춤, 한 떨기 꽃 같던 웃음…… 노인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아버지…… 저도…… 이제 다 컸답니다……"
"그래…… 너도, 그리고 마이도, 모두 커가겠지……" 어쩌면 세월이 정말 사람을 바꿔 놓는지도 모른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충동을 느꼈다. 이제는 손녀의 행복을 위해 사명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만 할 때였다.
지나간 것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