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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다

이건 Soul과의 우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힐리 같은 연약한 여자 한 명이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용기를 짜내어 상대를 마주했다.
[player]이렇게 여럿이서 여자애 하나를 괴롭히다니, 그럼 당연히……
사실, 이러면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먼저 서로 큰소리를 치다가 마지막으로 최후 통첩이라도 하게 줄 알았는데……
내가 힐리를 위해 나서겠다고 말하며, 속으로 다음 대사를 생각하던 순간 바로 방망이를 든 깡패가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덩치 큰 깡패]죽고 싶어서 환장했다면야!
뭔데? 영화랑 다르잖아! 야구 방망이가 갑작스레 날 향해 휘둘러지고, 몸이 굳어서 꼼짝없이 맞겠구나 싶었던 순간…… 귓가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오더니, 채찍 하나가 내 구레나룻을 스치고선 눈앞의 방망이를 후려쳤다.
나는 못이라도 박힌 듯 꼼짝 않고 서서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저러다가 채찍이 얼굴에 스치면 어떡해.
싸워서 지고 이기고는 한 순간이지만, 이 잘생긴 얼굴에 난 상처는 평생이라고.
날렵하게 내 옆에서 뛰쳐나간 힐리가 다시 건달들과 맞붙기 시작하면서, 평소 동물들을 조련할 때에도 잘 안 쓰던 채찍이 '휘익휘익'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그제서야, 난 저 채찍이 동물 훈련용이 아니라 사람에게 사용하는 거라는 사실과 힐리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라 그야말로 장군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힐리가 여러 상대와 싸우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자, 왠지 모르게 저번에 본 원X우먼 영화가 생각났다…… 설마 사실 힐리도 어떤 부족에 속해있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힐리가 쳐내서 떨어뜨린 야구 방망이를 주워 몇 번 휘둘러 보니 착착 감기는 손맛이 꽤나 좋았다. 그리고 구경만 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방망이를 들고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싸웠다고는 해도 주된 역할은 힐리를 돕는 것이었다. 채찍에 맞고 넘어진 적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머리에 '깡!' 하고 한 방 먹여줘서 계속 누워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역할.
게임 속에서 이런 플레이를 했다가는 욕먹기 십상이겠지만 힐리는 적을 때리면서도 마치 내 가능성을 봤다는 듯 틈틈이 내가 격려와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얼떨결에 시작했던 싸움은 끝나는 것도 빨랐다. 십여 분 뒤, 힐리가 리더였던 깍두기 머리를 쓰러뜨리고 녀석들을 벽 앞에 엎드리게 했다. 난 뒤이어 방망이를 휘적거리며 심문을 시작했다.
[player]너희들은 누구지?
[깍두기 머리]나는 밧쌔, 보통은 다덜 바켱이라고 부르지.
[player]밧쌔?
[깍두기 머리]밧쌔가 아니라 박!새!
[player]음…… 아무리 들어도 밧새라고 들리는데.
[깍두기 머리]아따, 니 같은 사람이랑 야기하면 피곤해 죽겠당게. 말혔잖소, 박새라고.
상대가 기를 쓰며 강조하는 모습을 보자, 갑작스레 무언가가 떠올랐다.
[player]아…… 박새라고 한 거야?
[박새]그려. 밧새가 아니라 박새. 너도 박형이라고 불……
[player]뭐?
[박새]음…… 그냥 박형이라고 불러잉. 우리가 누군지는 알려져도 상관 없것제. 우린 모두 '까마귀'쪽 사람이여라.
[player]응. 방금 날 협박할 때 '까마귀'라고 했던 거, 들었어.
[player]중요한 건, 대체 왜 힐리한테 덤벼들었던 건데?
[박새]지금 뭔소리 하냐. 우리가 귀찮게 굴었다고?
[박새]거 참, 난들 알것어?
[박새]누가 누굴 귀찮게 했다 그러냐? 우리는 암것도 안했는디, 쟈가 달려와서 먼저 공격한 것이여.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매우 놀랐다. 내 생각과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인데.
나의 상상: 힐리는 Soul로 공연을 하러 가던 길에 '까마귀' 무리를 만나 싸움에 휘말렸다.
실제: 힐리는 Soul로 공연을 하러 가던 길에 '까마귀' 무리에게 싸움을 걸었다.
[평범 건달]박형, 저 나쁜 놈들이랑 말을 해서 뭐합니까, 저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마른 건달]맞아요, 박형. 저희 '까마귀'가 이런 수모를 겪는 게 말이나 돼요?
내가 사건의 전말을 잘 모른다는 걸 눈치채자, 엎드려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리더인 박새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얻어맞았으니, 누구라도 기분이 나쁘겠지.
[박새]느그들은 조용히 하고 있어잉. 나가 지금 몰라서 이러겠소? 우리가 이겼으면 이렇게 말로 할 필요도 없었어.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눈치가 빠른 걸 보니 박새가 놈들의 리더인 것 자체는 이해가 갔다.
[박새]우리는 있잖소, 보스가 시켜가꼬 여기를 지나는 중이었는디… 인자 너거들도 상황은 파악됐겄지?
[박새]계속 이런 식으로 싸움 걸어재끼면 우리 까마귀도 가만히 못있제.
[힐리]하.
내 옆에 서 있던 힐리가 가당찮다는 듯 피식 웃더니, 손에 든 채찍을 공중에 세차게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니 또다시 '교육'을 시작해 버릴 것만 같길래, 난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player]여자 무사 힐리, 참아 참아.
[player]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냥 말로 해 줘, 내가 대신 해결해 줄게.
[힐리]흥! 쟤네한테 물어보던가.
이쯤에서 나는 뭔가 무력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게임을 할 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NPC 둘 사이에서 대신 말을 전해 주며 고생하는 그런 기분. 아무래도 난 착한 시민으로 사는 이상 이런 퀘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인가 싶다.
[player]에…… 박새, 그래서 당신은 뭘 하러 가던 중이었는데?
[박새]'까마귀'의 일을 외부인한테 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라.
박새의 말을 들은 힐리는 다시 채찍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