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숨을 손에 쥔 '망나니'가 된 기분은 참 별로였다. 하지만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란 스스로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사람들의 미래까지도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player]오른쪽 길을 고르겠어.
짝짝짝. 내 대답을 들은 죠는 박수를 쳤다.
[죠]그럼, 오른쪽 길을 고른 차장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알아보도록 하지요.
[죠]당신은 노인 다섯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갈림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거장이 있어서, 당신은 열차를 멈춘 뒤 그 일꾼을 구해내고 다시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죠]비록 사람이 하나 늘었지만, 모두가 자신의 몫을 조금씩 나누어 주니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일꾼은 모두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매번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일꾼에 대한 모두의 평가는 날이 갈수록 상승했죠.
[죠]오랜 길을 가는 열차엔 각양각색의 문제가 생기곤 하지요. 어느날 수리 도중, 일꾼은 놀라운 수리 실력을 모두에게 보여 줬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저 일꾼이 사실은 훌륭한 수리공이며, 기계를 다루는 일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죠]일꾼의 수리 덕에, 열차는 비록 새것처럼은 아니더라도 수명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각자의 꿈에 닿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고, 열차는 그렇게 모두의 꿈을 실은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답니다.
비록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그때 죠가 내린 선택이었단 것을.
이야기를 끝낸 그는 품속에서 새 편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저 평범해 보이는 양복 아래엔 무슨 도라X몽의 4차원 주머니 같은 거라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죠]사라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상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잔인한 사람도 있었군요. 후후, 후후후후……
[죠]PLAYER, 우리들의 몸에선 같은 썩은내가 나는군요. 언젠가 기필코 교차하고, 부딪히고선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게 얽힌 뒤 마지막엔 "붐!" 하고 터져 버리겠죠.
그는 가슴팍에 손짓으로 무언가 터져나오는 듯한 모양을 그렸다, 마치 마음속에서 현란한 불꽃이 터져나오는 것처럼.
[죠]그럼, 그날이 오길 진심으로 고대하지요.
편지를 들고 공원을 나가자, 힐리가 길가의 나무에 기댄 채 잔뜩 짜증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편지를 전해준 피에로가 가련하게 쪼그린 채로 세상 다 살기라도 한 듯한 불쌍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날 발견하는 순간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 듯하더니, 재빨리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공원으로 달려갔다.
내가 돌아오는 걸 본 힐리는 딱히 그를 잡으려 들진 않았고, 대신 날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받은 나는, 방금 있었던 피에로와의 대화를 간단히 전달해 줬다. 물론 그 열차 이야기도 포함해서.
내 얘기를 들은 힐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린 듯했다.
[힐리]죠한테서 대강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내가 전부 알려줄게.
나와 힐리는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힐리는 왠지 조금 감상적인 표정이었다.
[힐리]죠랑 나는 Soul의 2대 단장인 '시드'가 거둬준 아이야.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춤을 사랑해서 함께하게 됐을 뿐인 사라랑 달리, 우린 어릴 적부터 극단이랑 같이 사방을 떠돌면서 온갖 인간 사회의 모습을 봤지.
[힐리]하지만 함께 있었던 시간만 가지고서 사라가 Soul에 품은 애정이 우리보단 적다고 할 순 없겠지. 사라는 착하고 쾌활한 데다가, 다가가기도 쉬워서 모두가 좋아하고 있어.
[힐리]시드랑 사라는 둘 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받은 교육도 비슷했어. 그래서 문제를 대하는 태도 또한 유사했지. 따라서, 차기 단장으로 시드는 사라를 골랐어. 차기 단장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죠가 보기엔 이 모든 것이 사라에 대한 시드의 편애였던 거야.
[힐리]너도 알겠지만 Soul은 일 년 내내 세계 각지에서 순회 공연을 하는데, 초대 단장 때부터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를 거두는 전통이 있었어. 그리고 오래 함께하다 보니 Soul의 모두는 같은 일을 하는 동료보다는 가족에 더 가까운 사이가 됐지.
[힐리]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었어. 나쁜 점이란 바로 지금의 Soul엔 노동력이라곤 거의 없는 어르신분들이 많아서 가계가 갈수록 빠듯해진다는 거였지…… 사라가 단장을 맡게 됐을 땐 이미 적자를 보는 중이었고, 공연도 그저 생계를 위해서 하게 되었어.
[힐리]죠는 진작부터 이 문제를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고통받느니 힘들어도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좋다고 봤어. 그 사람들이 Soul의 짐짝이 되게 하느니, 차라리 Soul을 떠나게 해서 각자의 살길을 찾도록 하는 게 맞다고 본 거지.
[힐리]하지만 사라는 Soul을 집으로 여기고, 동시에 멤버들을 가족으로 여겼어. 그렇기에 그들이 남아있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아무리 단장이라고 해도 권리가 없어.
[힐리]시드 또한 죠의 급진적인 면모와 사라의 포용적인 면모를 고려한 다음에야 단장의 자리를 사라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 거고.
[player]그럼 넌?
[힐리]나?
[player]넌 단장이 되고 싶지 않았어?
[힐리]난 혼자 행동하는 게 익숙해서, 단장이란 지위는 나한테는 번거로운 일이었지.
[player]그럼 죠랑 사라의 의견 차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힐리]사실 짐승들도 병들고 약한 개체를 버려서 무리를 지키곤 해, 자연에선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래서 나도 죠랑 사라의 생각을 가지고 누가 맞다 틀리다 따지진 않을 거야. 다들 그저, 서로 다른 방법으로 Soul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걸. 나 또한 나만의 방법이 있고.
[힐리]내가 사라의 곁에 남는 걸 선택한 이유는, 사라가 Soul을 위해서 더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사람이라고 내 직감이 알려줬기 때문이야.
[힐리]자,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 PLAYER, 넌 항상 주관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느 편을 들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냥 네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계속 해 줬으면 좋겠어.
[player]응, 알았어.
나와 힐리는 이 주제에 대해 더 파고들지 않고 잠깐 침묵했다가 죠에게 받은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손으로 그린 지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익숙한 그림체를 보아 죠 본인이 직접 그린 것 같았다.
거리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우린 목적지가 도시 동부의 어느 곳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어제 갔던 '까마귀'의 업소에서도 겨우 몇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나와 힐리는 지도를 소우무에게 보여 주기로 결정했다.
까마귀'의 업소에 도착했을 땐, 우리가 소우무와 약속했던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나는 오는 길 내내 머리를 굴려 약속 시간에 늦은 걸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도를 소우무에게 보여 주고선 "자, 여기 수상한 곳을 찾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업소 입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조금 예상 밖이었다. 도로 양측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감히 아무도 그 사이로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요 도로가 아니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교통 방해로 인당 5000코인씩 벌금을 물었을 것이다.
박새가 저 멀리서 우릴 발견하더니, 급히 우리를 불러 함께 소우무의 뒤에 섰다. 나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고 무슨 상황인지 물었고, 힐리는 표정을 굳힌 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player]무슨 일이야, 이거?
[박새]맞은 편은 우리덜이랑 계속 사이가 안 좋았던 그 '효' 놈들이지라. 막되먹은 정보상인 놈들인디, 겁 먹을 필요 없쇼.
[player]뭐 하러 온 건데? 싸우러? 조직들끼리 전쟁이라도 하는 거야?
[박새]아아, 그거야 느그 일 때문이제. 어디선가에서 너희가 '까마귀'한테 두루미를 찾는 걸 도와달라 부탁했다는 걸 주워 듣고선, 즈그들 쪽에도 정보가 있응게 우리 보스헌테 생색을 내려고 공짜로 알려 주겠다면서 저러는 거여.
[player]너네 보스가 승낙했어?
[박새]당연히 아니제, 그래서 여기 서있잖여.
[player]아, 분위기 살벌한 건 너도 알지?
[박새]나가 바보인 줄 아쇼잉?
만약 그게 이유라면……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소우무에게 보여줬다.
[player]여기, 보세요. 수상한 곳을 찾았어요.
이 핑계를 고민한 보람이 있다, 역시 나야.
그런데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중, 맨 앞에 있던 모자 쓴 청년이 뭔가 재밌다는 듯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PLAYER.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길래 조금 놀랐다. 사실 더 놀란 부분은, 박새도 깜짝 놀라며 마치 내 이름을 처음 알았다는 것마냥 날 바라봤다는 점이었다.
조금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player]날 알아?
[???]물론이지.
상대는 웃음을 흘리더니, 박수를 두어 번 쳐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뒤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주목! 지금 여러분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혼천 신사 무녀의 보호자이자 아사바 고등학교 학생들의 친구, 극단 Soul 의 명예 핵심 멤버, 샘 그룹의 VIP, 사이온지 카즈하의 유일한 제자, 카페 'éternité' 의 명예 고객, 아오츠유 중학교의 친절한 선배이자 중앙 공원 아이들의 우두머리이며……"
와우, 내 칭호가 이렇게나 길 줄은 몰랐는데, 괜히 미안해지게 말이야. 하지만, 그래, 놀랍지만 저건 사실이다. 더 말해 달라고, 듣기 좋으니까.
[소우무]너희들은 이제 여기서 볼 일 없다.
지도를 막 다 읽은 소우무는 마치 이 화끈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을 끊었다. 아쉽네, 아직 모두에게 들려줄 내 칭호들이 한참 남았는데 말이야.
소우무는 앞을 향해 손에 들린 지도를 흔들었다. 어조에는 비웃음 3할, 무시 4할, 냉담함 2할과 의기양양함이 1할쯤 섞여 있었는데, 어쨌든 눈앞의 청년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소우무]이런 흔해빠진 정보들까지 가지고 나와 생색을 내다니, 쿠츠지. 어째 숨 쉴 때마다 더 퇴보하는 것만 같군.
그러나 상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그저 시선을 내게로 보낼 뿐이었다.
[쿠츠지]쟤가 말했으니까, 따로 내 소개는 하지 않을게.
[쿠츠지]PLAYER, 사실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지. 소우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고, 소우무가 할 수 없는 일도 내가 할 수 있거든.
[쿠츠지]어때? 앞으로의 일을 내가 도와주는 건?
그가 이 말을 내뱉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내 옆 30cm 거리에 있던 소우무는, 맹렬한 눈빛과 팔뚝의 팽팽한 근육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날 두 조각 내버리겠다고 압박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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