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같은 걸 세 번이나 당하지는 않지. 모름지기 사람이란 숙일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이한 특급' 같은 건강에 해로운 놀이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던 난 그냥 굽히는 걸 택했다.
의외였던 건, 쿠츠지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가볍게 웃더니 내 손에 든 헬멧을 두드렸다.
[쿠츠지]잘 쓰라고, 진짜 드라이브를 시켜 줄 테니까.
반신반의하면서 바이크의 뒤에 앉자, 이번엔 정말로 꽤나 느긋하게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갗을 시원하게 간질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결국엔 갓길에 멈춰서고야 말았다.
[player]무슨 일 있어?
보기 드물게 입을 잠시 꾹 다문 그는, 몇 초가 지나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쿠츠지]기름, 다 떨어졌어.
쌤통이다! 쿠츠지의 불행에 기뻐하기를 삼십 초, 하지만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도시는 이미 저 멀리에 있었고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layer]근데 우리, 오늘 안에 돌아갈 수나 있는 거야?
[쿠츠지]그건 걱정 마, 근처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오토바이를 끌고 가는 쿠츠지와 난, 서로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쫑알쫑알 입씨름을 하며 걸었다. 그렇게 대략 십오 분쯤 걸었을까, 분기점에서 꺾어 들어가자 어느 눈에 익은 운전 학원을 볼 수 있었다.
나데시코가 날 데리고 왔던 곳이잖아? 이런 우연이.
쿠츠지도 여길 찾아서 온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익숙한 듯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아하니, 꽤나 자주 와 본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주유를 도와준 사람은 우연히도 저번에 나와 나데시코를 맞아 주었던 강사분이었다. 그는 나와 쿠츠지를 두어번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운전 강사]이번에는 나데시코랑 같이 안 왔네요?
[player]이번에는 끌려 온 거예요, 정말로.
[운전 강사]하하, 우리 학원의 유망주들이랑 사이가 좋은 걸 보니, 운전 실력도 꼭 갈고 닦아야겠네요.
[player]아하하……
운전 강사는 아마 '운전을 잘 한다'는 개념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쿠츠지와 나데시코의 차이란 고작 '교통 법규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과 '교통 법규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정도에 불과한 정도니.
주유를 마치고, 나와 쿠츠지는 학원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긴 뒤 도시로 향했다. 쿠츠지는 이번에는 착실하게, 이상한 길로 빠지지도 않고 과속도 하지 않았다.
[player]운전 학원 사람들이랑 왜 이렇게 친해?
[쿠츠지]응?
[player]난 또, '효' 출신 사람들은 운전 같은 건 다 혼자 감으로나 배우는 건 줄 알았지.
[쿠츠지]틀린 말은 아니지.
[쿠츠지]그래도 법은 지켜야 하니까. 이륜차를 운전하려면 면허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효'에선 면허증 발급 같은 건 못 해.
[player]영화 속에서 정보 상인들은 항상 잘만 위조해 내던데.
[쿠츠지]형씨, 문서 위조는 범죄라고?
[player]쓰읍… 당신이 법을 들먹이니까 참 기분이 묘하네, 그쪽은 도덕의 기준이 참 유연한가 봐.
[쿠츠지]유연해야 일하기에 좋지. 형씨가 정말 원한다면 '효'에서 신분증 세트를 싹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player]……아마 그런 게 필요할 일은 없을 걸.
[player]운전 학원 사람들은 당신이 '효'의 리더라는 거, 알아?
[쿠츠지]음…… 형씨, 설마 정보 상인이 무슨 명함 같은 거라도 만들어서 사방에 뿌리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player]에, 아니었어?
내 주변에 '효'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꽤 많다 보니, 스스로 홍보라도 하고 다니는 줄 착각했다.
[player]……뭐, 됐어. 운전에나 집중해 줘. 부탁이니까 사지 멀쩡하게 데려다 달라고.
[쿠츠지]큭.
함께 도시로 돌아온 뒤, 쿠츠지는 날 '기도춘' 근처의 어느 찻집에 데려갔다. 요즘 이 근처를 자주 방문해서 그런지 근처 경치도 이제 꽤나 익숙해진 상태였다. 나는 쿠츠지의 뒤를 따라 찻집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2층의 별실로 향했다.
[player]여긴 갑자기 왜?
[쿠츠지]물론 형씨한테 끝내주는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창문 옆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자, 난 그가 말하는 공연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별실의 창밖으론 바로 찻집의 정문이 향한 거리가 보였는데, 마침 거기서 '오이란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쿠츠지]'기도춘'에선 주기적으로 길한 날을 고른 다음, 가장 인기 있는 게이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기도춘'의 입구부터 이 길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게끔 하지. 이게 바로 기도춘의 '오이란 퍼레이드'야.
[쿠츠지]첫째로는 '기도춘'의 게이샤가 최고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 일대가 전부 '기도춘'의 것이며, 가장 뛰어난 게이샤만이 '기도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지.
[쿠츠지]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위치를 과시하는 의미도 있다는 거야.
[쿠츠지]십수 년 전, 아직 소녀였던 토죠 쿠로네가 자신의 재능과 미모로 모든 이들을 압도한 뒤로부터 아직까지 '기도춘'의 주인은 바뀐 적이 없어.
[쿠츠지]그래서 오늘날 '오이란 퍼레이드'를 책임지는 게이샤는 항상 그녀지.
나는 쿠츠지의 소개를 들으며 창가에 기대 퍼레이드를 지켜보았다. 인파 속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는데, 거리가 조금 먼 데다가 구슬을 엮어 만든 듯한 면사포를 쓰고 있는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쿠츠지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 창틀을 두드리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쿠츠지]저 사람, 저 사람이 바로 토죠 쿠로네야.
들려오는 곡조에 맞춰, 쿠츠지의 손가락이 리듬감 있게 창틀을 두드렸다. 마치 저 아래의 공연에 푹 빠져든 듯한 모양새였다. 이어서 토죠 쿠로네가 우리의 바로 밑을 지나가려 하자, 쿠츠지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곤 날 바라보았다.
[쿠츠지]형씨, 거래를 하기 전에 알려줘야 할 게 있어.
[player]뭔데?
[쿠츠지]내가 형씨를 경매에 보내고, 그 뒤에 이것저것 시킨 일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player]그렇긴 해. 딱히 가치 있는 정보를 물어왔다는 느낌은 못 받았거든.
[쿠츠지]아니, '형씨'가 갔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 있는 정보였어.
[player]그게 무슨 말이야?
[쿠츠지]그날, 형씨가 무슨 꽃을 고르든 토죠 쿠로네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하면 어쩔래?
[player]셋 다 토죠 쿠로네의 꽃이었던 거야?
[쿠츠지]아니, 그녀가 형씨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야.
[player]뭐라고?
[쿠츠지]처음부터 난 내가 지닌 정보로 추측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형씨의 행동이 그 추측을 검증해 주었지.
쿠츠지의 말을 들은 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나와 토죠 쿠로네 사이의 접점을 아무리 찾아본들, 그녀가 내게 먼저 다가올 이유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쿠츠지]형씨. 이전에 한 거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형씨를 위해 거래의 조건을 바꿔 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형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쿠츠지]첫째, 약속에 따라 내게서 힐리에 대해 묻는 것. 요즘 그녀가 뭘 하고 다녔는지 알려 주지.
[쿠츠지]둘째, 스스로를 위해 토죠 쿠로네와 관련된 것들을 질문하는 것. 그럼 내가 형씨한테 쓸모 있는 부분들을 추려서 알려 주겠어.
[쿠츠지]생각할 시간을 줄게, 형씨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바라지.
난 쿠츠지의 말을 듣고선 고민에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힐리에 관한 것을 묻는 게 맞겠지, 이거야말로 내가 의뢰를 수락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토죠 쿠로네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날 그녀가 꺼냈던 이야기들엔 무언가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평범했던 것들이,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참을 고민해 봐도 선택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사라와 라이언의 걱정하는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번갈아가며 나타났다가도, 동시에 귓가에 토죠 쿠로네의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쿠츠지]하아… 있잖아, 형씨가 좀 더 스스로를 위한다고 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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